- 1 -네 번째 강의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정책과 조선 천주교회 16세기부터 아시아·아메리카 선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의 선교 보호권 제도(Padroado) 하에 진행되었다. 교황청이 직접 선교지를 관리하기보다는, 이 두 나라에 ‘보호권’을 위임해, 선교사 파견과 교회 조직 운영을 맡겼었다. 그런데 선교 보호제도의 특권을 지녔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가 국력을 잃고 대내외의 난관을 겪으면서 차츰 그 빛을 잃게 되자, 교황청은 이 두 나라의 선교 전략에만 여러 나라의 선교를 맡겨둘 수가 없었다. 교황은 이 같은 난관을 헤쳐 나갈 새로운 선교 전략으로 1622년에 교황청에 새로운 부서인 포교성성을 설립한 것이었다. 마침내 세계 선교에 대한 최고 지도권을 교황청이 주도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1.교황청 새 선교 전략의 배경 포르투갈은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에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같은 항해자들의 활동 덕분에 인도, 아프리카, 브라질, 동남아시아까지 뻗어 나가며 "세계 제국"을 이룩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쇠퇴는 16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시작되었고, 결정적인 전환점은 1578년 모로코 전쟁에 참전했던 세바스티앙 왕(재위 1557~1578)의 전사와 1580년 스페인에 합병된 것이었다. 이후 회복을 시도했지만 19세기 브라질 독립으로 사실상 대항해 시대의 영광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스페인은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로 아메리카 식민지를 확보하였고, 16세기 초에는 멕시코(1521), 페루(1533)의 정복으로 은광을 확보하여 엄청난 은을 얻게 되었다. 펠리페 2세(1556~1598)는 네덜란드·이탈리아·아메리카·필리핀을 아우르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완성해 당시 유럽의 군사·정치·종교적 패권국이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생각보다 빠르게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588년 영국과의 해전에서 무적함대(아르마다)의 패배, 네덜란드와의 독립 전쟁(1568~1648)으로 부유한 네덜란드 지역의 상실이 본격적인 몰락을 가져왔다. 프랑스와의 30년 전쟁(1618~1648) 또한 재정 악화와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고, 1640년 포르투갈의 독립으로 이베리아 연합이 해체되었다. 1680년대의 재정 파탄과 군사력 약화로 영국·프랑스에 해양 패권을 넘겨야 했다.2. 포교성성 설립과 파리외방전교회의 탄생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1622년 “포교성성(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을 설립하여, 선교를 국가 의존에서 벗어나 교황청 주도의 보편적 체계로 재편하고자 하였다. 16~17세기 당시 아시아 지역(중국, 일본, 베트남, 조선 등) 대부분이 포르투갈·스페인 식민지 체제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식민 세력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선교할 성직자 집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당시 교회에는 포교성성이 설립된 이후 그 설립 취지에 발맞춰 선교 일선에 나서게 될
- 2 -선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1658년 7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M.E.P.)가 그 첫 문을 열어주었다. 프랑스 교회 성직자 프랑소와 팔뤼(François Pallu) 신부와 피에르 랑베르 드 라 모테(Pierre Lambert de la Motte) 신부가 중심이 되어 파리외방전교회를 설립하여 교황청의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3. 파리외방전교회 설립 목적 ① 아시아 지역 복음 전파 중국, 일본, 인도차이나, 조선 등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고 현지 교회를 세워야 했다. ② 현지 성직자 양성 선교사를 파견할 뿐 아니라, 현지인 사제와 주교를 양성하여 토착 교회를 자립시켜야 했다. 20세기에 설립되어 한국에 파견된 골롬반 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도 포교성 지침에 따라 선교지 성직자 양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했다. ③ 식민 권력에서 독립된 선교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Padroado, 보교권)”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교황청 직속으로 활동하는 독립적 선교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4. 파리외방전교회의 특징 특별한 목적으로 설립된 수도회와는 달리 교구 사제들이 모여 조직한 선교회였다. 즉, 수도서원 없이 교구에 소속된 사제로서 해외에 파견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설립 초창기부터 선교회원들은 중국·베트남·조선·시암(태국) 등에 파견되었다. 예수회원들은 선교할 때 대부분 고위 성직자가 아닌 선교 사제로 활동한 것에 비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교황대리대목제도 하에 교구장 신분으로 파견되어 선교 회원들과 그림 1 현 복음화부(포교성, 인류복음화성) 모습
- 3 -공동체를 이루며 선교하였다. 교황대리대목제도를 택하게 된 것은 보교권을 지닌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나라의 기득권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이 제도는 두 나라의 선교 지역 중에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교황이 직접 자기 이름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방법이었다. 선교지에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외방전교회의 특별 소명이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포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포교 지역에 종신토록 머무르면서 그곳의 언어와 풍습을 배워 포교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선교의 우선순위를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두었기에, 기존의 포르투갈식 선교와는 달리 정치 세력의 비호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의 첨병이라는 논란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통역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각 지역에 회장(會長)을 임명하여 포교 활동을 하고, 회장 중에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방인성직자(邦人聖職者)를 양성하려 했다. 결국 파리외방전교회는 파견된 포교 지역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현지인(現地人) 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이 직접 교회를 운영하도록 함을 목표로 삼았다.5.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 천주교회 1) 조선 대목구 설정(1831.9.9)과 초대 교구장 임명 1830년 11월 30일 비오 8세 교황이 선종했다. 그는 조선 선교지를 전담할 사도 생활단과 수도회를 물색하는 데 애쓴 교황이었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고, 64일간 83회의 투표 끝에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이던 바르톨로메오 알베르토 카펠라리 추기경이 제254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무라노섬에 있는 카말돌리회 성 미카엘 수도원 출신 수도자였습니다. 그는 유럽 선교에 헌신하였던 대 그레고리오 교황을 본받고자 자신을 ‘그레고리오 16세’라고 이름 지었다.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년) 교황은 사도좌에 오른 즉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이 아닌 교황청 관할 아래 해외 선교 활동을 추진하였다. 교황은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에 70개의 새 대목구를 설정하고 200여 명의 대목구장 주교를 임명해 파견하고, 해외 선교지를 교황청의 포교성성이 직접 관할 할 수 있도록 체제를 정비하였다. 아울러 포교성성 장관이었던 그는 조선 선교지의 현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또 조선 교우들이 얼마나 사제 영입을 갈망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교황은 조선 선교지 관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831년 7월 4일 포교성성 추기경 회의를 열었다. 추기경들이 이 회의에서 최종 의결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선교를 자원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파견을 지지하며 그 지원을 허락한다. 그리고 주교의 조선 입국에 앞서 먼저 중국인 여(항덕) 파치피코 신부를 입국시켜 그로 하여금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고 추진하도록 한다.
- 4 - 둘째, 조선을 북경 주교에서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한다. 단, 북경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로 한다. 셋째, 새로 설정되는 조선대목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할 것인가 아니면 포교성성이 직접 관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고 또 그 체류가 충분히 보장될 때까지’ 그 결정을 연기한다. 다음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소 브뤼기에르 주교의 편지 내용이다. “1832년 7월 25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담당 장 앙투완 뒤부와(Jean-Antoine Dubois) 신부가 보낸 편지가 제게 도착했습니다. 편지에는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서 소칙서를 반포해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시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저를 임명했다는 소식이 담겨있었습니다. 제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지 10개월 만에 이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로 저의 망설임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저는 더는 고민하지 않았고, 페낭 신학교 교수진 누구도 저의 조선행을 만류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포교성 추기경 회의의 결정은 조선대목구의 운명이 온전히 저 브뤼기에르에게 달려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줬습니다. 제가 조선 입국에 성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가 조선대목구의 독립과 지속적인 선교사 파견을 보장하는 보증서였습니다.” 1831년 9월 9일 성모님께 처음으로 봉헌된 성당인 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서 조선대목구 설정과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한다는 두 개의 소칙서를 반포했다.“ 2) 조선 대목구 설정(1831.9.9) 칙서 "일을 길이 기억하기 위하여,1. 하느님의 높으신 섭리로 저의 어깨에 짊어진 사도직의 의무로 주님의 모든 양 떼의 책임을 맡고 있는 저는 ……(중략) 2. 특히 사도좌 선교사들이 언젠가는 마침내 조선에 들어가서 그곳에 사는 교우들의 딱한 사정을 도와주고 ……(중략) 저는 선교 사업을 주관하는 로마 성교회의 공경하올 추기경 형제들의 권고로 지금 당장 조선 나라를 새로운 대목구로 설정하고, 거기에 북경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대목구장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3. 그러므로 저는 자진하여, 그리고 확실한 지식과 깊은 고려 끝에 교황의 충만한 직권을 가지고 이 교황 칙서로써 조선 왕국을 지금 당장 새 대목구로 설정하는 바이며, 이 대목구에 북경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대목구장을 세울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중국 각 지방이나 중국에 인접한 지역에 있는 교구장들에게 관례적으로 부여되어 온 특권을 모두 또한 일일이 교황청에서 간택할 이 교구장에게 저의 권한으로 부여하는 바입니다.4. 이 칙서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결정적이요 유효하고 효과적인 것이 되고, 그 전적인
- 5 -효력을 유지할 것을 결정하며, 누구든 어떤 권위로나, 알고 혹은 모르고 이 칙서와 다르게 행하려고 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무효하고 쓸데없는 것이 될 것임을 결정하는 바입니다.5. 이 칙서의 효력은 교황의 규정과 교회법으로, 이 칙서가 정한 바와 반대되는 것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그밖에 특별하고 명백하게 언급되고 제한되어 마땅한 다른 규정과 벌칙으로도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서 어부의 반지를 찍어1831년 본 교황 재위 1년 9월 9일 반포함국무원장 토마소 베르네티 추기경3) 조선 대목구장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 임명 칙서 “공경하올 형제 갑사 주교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께, 경애하올 형제여, 인사와 교황 축복을 받으시오. ……(중략) 샴 교구장인 소조폴리스 주교의 보좌주교이며 공경하올 형제인 그대가 조선에 들어가 조선의 신입 교우들의 일을 맡아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을 때, 나는 조선 교우들의 궁핍한 사정을 고려하고 또한 샴 교구장은 자기 보좌주교로 삼을 만한 적당한 신부를 따로 구하기가 쉬울 것이라는 이유를 생각한 끝에, 추기경들의 의견에 따라 그대의 청을 너그러이 들어, 아무 지장이 없는 한 새 선교지로 떠나가기를 허락하며, 이 일을 다행히 또한 복되게 끝내도록 나의 이 칙서로써 지금 그대를 나와 교황청의 자의로 조선 대목구장으로 선택하고 임명하고 정하여 중국 지방과 중국에 인접한 지역에 관례적으로 부여되는 모든 특권을 부여하는 바입니다. ……(후략)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서 어부의 반지를 찍어1831년 본 교황 재위 1년 9월 9일에 반포함그레고리오 16세 교황“6.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조선 선교사들의 사목 현황 1) 초대 조선교구 대목 소 브뤼기에르 주교
- 6 -1) 1827년 11월 17일 자 포교성이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포교지 설치를 돕기 위하여 선교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맡아주기를 문의하자 신학교 지도자들은 각 지역에 있는 회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달레, 안응렬ㆍ최석우 역, ????韓國天主敎會史???? 中, 분도출판사, 219쪽). 2) 다섯 가지 이유 : 첫째, 전교회에는 현재 기금이 없다. 둘째, 해외에 파견할 선교사가 부족하다. 셋째, 다른 포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 넷째, 조선 포교지로 선교사가 들어가기 어렵다. 다섯째,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차기진, 「박해 시대의 한국 천주교회」(4), ????교회와 역사???? 제286호(1999. 3), 3쪽]. 1825년 33세의 나이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이듬해에 샴에 도착하여 그곳 신학교에서 활동하던 중 1828년 6월에 보좌주교로 선임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 여건이 열악한 조선의 신자들이 선교사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러던 중 파리 본부로부터 조선 포교지에 관해 묻는 서한1)을 받게 되자 1829년 5월 19일 자 답서를 통해 전교회 본부에서 내세운 다섯 가지 이유2)를 반박하고, 가능한 한 빨리 지원자를 선발하여 조선으로 파견하되 지원자가 없으면 자신이 조선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시암의 교구장 플로랑(Esprit Maria Jos. Florens, 1834†) 주교도 1829년 6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의견에 동의하는 서한을 포교성으로 보냈고, 브뤼기에르 주교 자신도 그동안 거절해 오던 1828년 2월 5일자 교황 소칙서에 따른 캅사(Capsa) 명의 주교요, 계승권을 지닌 보좌주교 임명을 수락하여, 1829년 6월 29일 방콕에서 주교 서품식을 가졌고, 1829년과 1830년에 거듭 포교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교황의 허락을 얻어 주도록 간청하였다. 포교성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의견을 수락하고, 1831년 7월에 개최된 추기경 회의에서 조선 포교지를 대목구로 설정하는 동시에 그를 조선 대목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할 것을 의결하였다. 이로써 조선교회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겨지게 되었다. 2) 모방 신부 – 파리외방전교회 첫 조선 입국 선교사 1836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세 신학생을 선발(2월 6일 최양업, 3월 14일 최방제, 7월 11일 김대건) 등이 모방 신부의 사제관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고 있었다. 모방 신부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르그레즈와(1801~1866) 신부와 이전에 약속한 대로 신학생들을 극동대표부로 보내려고 하였다. 조선에 신학교 설립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마카오로 보내려 한 것이다. 그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적절한 장소에 신학교를 세워줄 것을 요청하였다. 1836년 12월 2일 세 신학생은 조선 선교지의 장상들에게 순명 서약을 하고, 조선 선교지의 장상에게 신청하여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다른 수도회나 선교회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그렇게 한 후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여 파치피코(여항덕, 1795~1854) 신부를 중국으로 되돌아가도록 조처하였다. 3)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 백 주교
- 7 -3) ????바오로 뜰 안의 애환 85년????,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도회 85년사 편찬위원회, 가톨릭출판사(1973), 124-128쪽 참조.4) 르그레즈와(Pierre Louis Legrégeois, 1801~1866) : 파리외방전교회 회원.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의 스승.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에서 활동하다가 1830년에 마카오에 있던 극동 대표부의 대표가 되었다. 1837년에는 극동대표부 안에 임시로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의 세 신학생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다. 1841년 말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자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35쪽, 각주 7 참조)5) 르그레즈와 신부가 1840년 3월 15일에 마카오에서 파리 본부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위의 책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143-145쪽 참조) 안남(베트남) 교회와의 인연은 조선 제7대 교구장 블랑 백(한국명 白圭三) 주교에 의해 맺어졌는데, 백 주교는 1885년에 샬트르 바오로 수녀회 사이공(현 호찌민시) 관구장인 멜 장지다 수녀에게 조선에 수녀 두 사람의 파견을 요청하였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 파견된 두 수녀는 풍랑으로 배가 파선되어 조선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 후 1888년 백 주교가 다시 프랑스의 샬트르 바오로 수녀회 본부 총장 수녀에게 수녀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프랑스 수녀 2명과 사이공 관구 소속 중국인 수련수녀 2명의 조선 파견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 두 명의 프랑스인 수녀는 1888년 5월 마르세유 항구를 출발하여 그해 6월 30일에 안남 사이공(호치민시)에 도착하였고, 다시 그곳에서 중국인 수련수녀 두 명과 합류하여 함께 조선으로 출발하여 7월 20일에 인천항에 도착하였다.3) 블랑 주교는 1876년 병자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점차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1882년, 1883년, 1884년(두 차례) 4차례에 걸쳐 21명의 신학생을 페낭으로 유학 보냈다. 이들 가운데 강성삼, 강도영, 정규하, 한기근, 김성학, 이내수, 김원영, 홍병철, 이종국, 김문옥, 김승연 등 11명이 사제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들은 인종과 풍습이 다른 10여 개국의 유학생들과 함께 4~9년 동안 교양과정, 철학과정, 신학과정을 공부하였고, 이들 중 후에 고국으로 돌아온 11명이 사제로 수품된 것이다. 그러나 기후와 풍토가 다른 페낭에 유학한 신학생들은 풍토병으로 심한 고난을 겪었고, 21명중 7명은 병사(病死)하기까지 하였다.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자 전교활동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1887년에는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하여 페낭에 유학하고 있던 신학생들을 본국으로 불러드렸다. 4) 페낭 신학교 파리외방전교회가 1807년 말레이반도 서해안의 작은 섬 페낭(Penang, 彼南 또는 濱榔으로도 표기함)에 세운 신학교이다. 방인 성직자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파리외방전교회는 1665년경부터 당시 시암 왕국의 수도였던 아유티아에 동양 포교지 신학교를 설립, 운영해 왔으나 박해와 전쟁으로 베트남, 인도의 퐁디셰리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1807년 페낭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페낭은 영국령이었다. 페낭에 신학교가 설립되자 박해로 인해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던 조선, 중국, 베트남, 일본, 미얀마, 태국, 말라카이 등지의 동양 10여 나라에서 온 신학생들이 사제 수업을 받았다. 르그레즈와 신부4)의 한 서한에 의하면, 1840년경 페낭 신학교는 신학생 36명이 머무를 정도의 규모였고, 그 당시 30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며, 팃스랑(Claude C. Tisserand, 1809~1870) 신부가 교수 및 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5) 마카오에 유학시켜 김대건, 최양업 두 신부를 양성하는 데 성공한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
- 8 -자들은 박해가 비교적 완화된 철종 시대에 이르러 다시금 신학생 파견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1854년 메스트르 신부는 이만돌 바울리노, 임 빈첸시오, 김 요한 등 세 사람을 선발, 페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 뒤 병인교난(1866)으로 정세가 긴박해지자 신학생 파견은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5) 돌아보기 파리외방전교회는 창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 선교사 4천여 명이 파견되었는데 그중 170여 명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한편, 본회는 현지인 성직자 2천여 명을 양성하였는데 그중 한국인은 100여 명에 이른다. 오랜 역사 동안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민족들과 함께 그 나라 역사에 참여했으며 선교사 170명이 순교했는데, 그중 24명의 선교사가 한국에서 순교했고, 10명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한국 천주교회 발전의 디딤돌 역할을 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에 파견되시어 박해 속에서도 굽힘 없이 사시다가 순교하시기까지 하셨다. 걸림돌의 모습을 찾아본다면 평신도 중심의 조선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교회로 변모되어 간 점이라 하겠다.그림 4,5,6 현 페낭신학교, 성당, 우도 신부와 조선신학생들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