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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제2강 바오로 사도 성상의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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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인류의 작품인 성화 성상과 하느님의 작품인 <성스러운 얼굴(聖顔)>


묵상 성구

탈출 20,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레위 26,1; 신명 5,8)

요한 1,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콜로 1,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 사도 18,9; 22,17; 23,11; 1코린 15,8)

인간의 작품인 성화성상들 : 성모상, 십자고상, 사도들 성상

하느님 계시로 완성된 성화 : 만딜리온, 판토크라토르, 베로니카의 수건,

토리노의 수의, 과달루페 성 디에고의 틸마에 새겨주신 성모님 상

하느님 계시하시고 작가가 묘사한 성화 :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계시하신

자비의 예수님 성화

 

1. 답동성당 바오로 성당

답동성당은 초기에 주보 성인이 지정되어 있지 않아서 제4대 주임 전학준(으제니오 Deneux) 신부 재임기인 191521일 성 바오로 사도를 주보 성인으로 선정 630일을 본당 주보 축일로 정하였습니다. (답동 대성당 100년사113)

인천교구 제2대 교구장이신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님은 인천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여 인천교구 주보이신 <바다의 별 성모님>과 답동 주교좌 성당 주보이신 사도 성 바오로 상을 대성당 앞 정원에 설치하도록 제안하셨습니다. 주교님의 제안에 따라 당시 답동 대성당 이민주 요한 세례자 주임신부는 201111월에 바다의 별 성모님과 사도 성 바오로 성상을 성당 앞 정원에 설립하였습니다. 이때 세운 바오로 성인의 조각상은 가톨리아에 제작 의뢰한 것(작가 선진규 알렉산데르)이었습니다. 두 성상이 설립된 곳에는 원래 성모자상과 예수 성심 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2. 바오로 사도 성상의 타래 수염의 의미는 무엇일까?

 

얼마 전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대학 부설 교리 신학원에서 발간한 <밑돌>20256월호에 실린 윤인복 소화 데레사 교수의 글 - <하늘과 땅이 결합한 완전한그리스도의 얼굴> - 을 읽은 후 바오로 사도 성상의 신비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상의 타래 수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학적·예술사적 상징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윤인복 교수님의 밑돌지 글을 보며 고대 로마 후기 및 비잔틴 시대 성상의 상징들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대-비잔틴 전통의 흔적

 

고대 로마 후기 및 비잔틴 성상(icon)”에서, 지혜와 신비, 경건한 철학자의 이미지를 표현할 때 수염과 머리카락을 둥글게 꼬아 장식하였습니다. 이는 성인을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전한 영적 지도자로 상징화한 것입니다.

 

지혜의 상징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철학자나 현자의 상징은 긴 수염이었으며, 그 형태가 정돈되고 조각적으로 강조되면 내면의 질서, 지혜, 사색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최고 신학자, 이방인의 사도, 지적인 사도이시기에 이러한 상징적 표현이 매우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3. 그리스도교 도상학에서의 바오로 사도의 몇 가지 수염 표현

 

단정하고 길게 흐른 수염 - 예언자적 존엄, 지혜, 신앙의 권위, 지혜로운 설교자,

말씀의 해석자, 고난을 통한 성숙을 묘사함

타래 모양 수염 - 깊은 사색,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복잡한 통찰과 묵상, 철학적

깊이, 신비성, 성인의 내적 질서를 상징함

날카롭고 뾰족한 턱수염 - 진리를 꿰뚫는 말씀의 칼, 논증가로서의 정체성 표현

 

이 같은 수염 표현들은 비잔틴 및 중세의 영향으로 인간 초월적 위엄을 강조하는 성화의 전통을 계승해 왔음을 엿보게 해줍니다.

 

2: 신의 성스러운 얼굴(聖顔)

 

1. 비잔틴 전승 만딜리온(Mandylion - acheiropoietos)

비잔틴 교회의 성스러운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최초 모습은 예수님 살아 계실 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리스도의 얼굴(聖顔)이 아마포 수건 위에 나타났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며, 그리스어로 만딜리온(Mandylion)’이라 불린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를 아케이로포이에토스’(사람의 손으로 그리지 않은 얼굴이란 뜻) 명칭을 사용하며, 이 형상을 최초의 진정한 그리스도 얼굴로 간주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가 중병에 걸려 예수님에게 치료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예수님은 답신과 함께 당신의 얼굴이 새겨진 아마포 수건을 보냈다고 한다. 아브가르 왕은 이 이미지를 성스럽게 여기고, 이를 도시의 출입구에 걸어 도시를 보호하는 성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이미지가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팔라디움(=도시를 보호하는 聖物) 역할을 하였으며, ‘아케이로포이에토스그리스도의 신적 위엄과 권능을 강조하는 중요한 신학적 상징이 되었다. 이후 아케이로포이에토스 명칭은 십자가형 후광을 배경으로 한 그리스도의 얼굴만 묘사된 도상으로 발전하며, 비잔틴 미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사각의 십자가가 새겨진 원의 중심에 그리스도는 완벽히 정면을 바라보며, 길고 가지런한 턱수염과 타래 모양의 머리카락이 특징이다.

 

2. ‘완전한 하느님완전한 인간그리스도

우리에게 조금 친숙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6세기경의 것으로 시나이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보관된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 형식의 그리스도 이콘이다. ‘판토크라토르만물을 지배하는 우주의 통치자를 의미하며, 하느님의 전능함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붉은 자주색 튜닉(상의)과 짙은 푸른색 히마티온(그리스식 겉옷, 망토)을 입고 있다. 붉은색은 그리스도의 인성(地上), 푸른색은 신성(天上)을 상징하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의 결합 즉 삼위일체를 암시한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의상은 황제보다 높은 지위를 의미하기 위해 금빛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오른손으로 인류를 축복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귀한 보석으로 장식된 성경을 들고 있다. 오른손의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를 의미하며, 나머지 두 손가락은 하늘과 땅의 결합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정면을 응시하며 무표정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위 이콘 안에는 고요, 관조, 평정, 침묵을 강조하는 도상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의 두 눈은 서로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데, 왼쪽 눈은 약간 날카롭고 엄격한 표정을 지어 완전한 하느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반면 오른쪽 눈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완전한 하느님과 완전한 인간으로 드러낸 그리스도의 얼굴은 금빛 후광과 이콘 맨 위 양쪽 모서리의 여덟 개 광선의 금빛 태양으로 더욱 빛나고 있다. 빛나는 영광을 의미하는 후광은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흐르는 하느님의 빛을 의미한다(2코린 4,6 참조). 후광 안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데, 이후 그리스도의 후광에는 그리스 문자 Ὁ ὭN이 들어간다. 이는 나는 있는 나다.”(Ἐγώ εμι ὁ ὤν 탈출 3,14)로 하느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시고, 생명의 원천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생명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존재로, 참된 왕이자 창조주의 모습을 지닌다.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와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영원한 생명의 빛을 얻기를 청한다.

 

3. 대표적인 아케이로포이에토스(Acheiropoietos)의 예들

1) 베로니카의 수건

전승에 따르면, 성녀 베로니카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얼굴을 닦아 드렸고, 예수님의 얼굴이 그 수건에 기적적으로 새겨졌다고 전해진다.

<십자가의 길 기도> 6처에서 이 성화를 묵상하며 기도하게 된다,

 

2) 토리노의 수의(Shroud of Turin)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다고 전해지는 천, 거기에 예수님 몸의 흔적이 기적적으로 찍혀 있었다고 한다.


3) 성모님의 선물 과달루페의 성모상

일부 지역에서는 성모상이 기도 중이나 환시 가운데 기적적으로 나타났다고 믿어져 아케이로포이에토스로 간주되기도 한다.

 

신학과 교의(dogma)에서의 논의

 

인간의 예술이 아닌 신의 개입으로 만들어졌다는 거룩한 성화에 관한 믿음은 성화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신학적 전략이기도 했다.

 

 

3:성화상(聖畵像) 파괴 논쟁

 

"성 화상 파괴 논쟁"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특히 비잔틴 제국과 서방교회에서 큰 영향을 끼친 신학적·정치적 논쟁이다. 주로 8~9세기 비잔틴 제국에서 벌어진 논쟁을 가리킨다.

 

1. 배경

 

초기 그리스도교는 우상숭배 금지라는 구약 전통 때문에 성상(聖像) 사용에 신중했었다. 그러나 하느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을 취한 이후, 신약에서는 성화상 금지를 더 이상 구약과 같은 의미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 마리아, 성인들의 모습을 담은 성상이나 벽화, 모자이크가 신앙 교육과 영적 도구(기도, 묵상)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성상은 성경을 눈으로 읽는 책과 같은 역할을 하여 그 쓰임이 다양해졌다.

초기 로마 시대 300박해 시기에는 십자가, 물고기(ἰχθύς) 같은 상징만 사용했으나,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성화(icon)”가 자유롭게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고 허용되는 것인지는 늘 문제가 되었다.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반삼위일체적 신학을 펼치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는 과정도 초기 교회 역사에서 성화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2. 회교도(무슬림)의 무상(無像, aniconism) 전통이 끼친 영향

 

아라비아인들이 630~640년대,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그들의 무상(無像) 신앙은 비잔틴 그리스도교 세계의 성상 논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회교도들은 비잔틴 제국을 침략하여 승리를 거둔 7세기 말부터 이슬람인들은 721년에 자체적으로 그리스도교 예술을 파괴하라는 칙령을 선포했다. 이슬람은 쿠란의 문자를 제외한 모든 형상을 우상숭배로 부정하는 전통을 가졌기 때문이다.

 

1) 이슬람의 무상(無像) 전통

꾸란과 하디스(언행록)에는 하느님을 형상으로 그릴 수 없다라는 사상이 뚜렷했다.

인간이 신적 존재를 그림·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초기 이슬람 공동체는 십자가, 성상, 성당 내부의 그림 등을 이교적 행위로 공격했다.

 

2) 아라비아인들의 종교적 선전

우상숭배 비난 : 그리스도교의 성상 공경을, 고대 아랍 다신교의 우상숭배와 동일시함

신의 절대 초월성 강조: “참 신은 무형하시며, 그 어떤 피조물로도 표현될 수 없다.”

예언자 전통 : 모세, 예수, 무함마드 모두가 우상숭배를 거부했다고 주장하면서 성화상

파괴를 정당화했다.

 

3) 무슬림이 비잔틴 그리스도교 세계에 끼친 영향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아라비아 지배하에 있던 곳에서는 성상에 대한 반감이 점차 고조되었다. 후일 비잔틴 제국 내 성화상 파괴 운동의 신학적 정당화에도 큰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대 동로마 제국에서는 두 차례(1: 726~787/ 2: 813~843) 대대적인 성상 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3. 비잔틴 황제 레온 3- 1차 성상 파괴 논쟁 (726~787)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레온 3(재위 717~741) 성상 숭배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보고, 730년에 성화상 공경의 금지령을 전 제국에 공포하였다. 이에 대해 성상 옹호자들은 성상은 숭배가 아니라 존경의 표시이며, 그 공경은 성상 그 자체가 아니라 원형(Prototype, 즉 성인/그리스도) 에게 향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3(재위 731~741)는 로마의 한 교회 회의에서 황제의 조처에 반대하여 성상 공경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자, 동서 교회 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726, 레온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궁전 입구인 칼케(Chalke, 청동문) 위에 장식된 그리스도의 대형 황금 성화를 파괴하였다. 또한 성화상을 제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인의 유해를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데까지 광범위하게 하였고, 수도원 탄압에까지 이르렀다.

성화상 논쟁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5(741~755, 레오 3세의 아들) 때 절정에 이르렀다. 히에레이아 교회 회의에서 754년 종교적 내용이 담긴 모든 성화상의 파괴를 지시하였다. 이 조치에 반기를 든 수도자들에 대한 박해와 처형으로 많은 지방에서 수도자들이 거의 전멸하였다. 갈등과 대립이 커지자, 여황제 이레네787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논의 끝에 성상 공경은 정당하다고 결정하였다. 공의회는 이 논쟁을, 흠숭과 공경을 구별함으로써 해명하였다. , 흠숭은 하느님께만 드리고, 공경은 피조물에게도 드릴 수 있다고 하였다.

 

4. 레온 5세 황제 - 2차 성상 파괴 논쟁 (813~843)

 

레오 5(재위 813~820)가 다시 성상 파괴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후 여러 황제가 성상 사용을 제한하거나 금지하였다. 그러나 성상 옹호론자들의 저항도 강했고, 수도원 운동과 연결되어 큰 사회적 갈등으로 번져나갔다.

결국 843년 테오도라 황후에 의해 성화상 공경이 최종적으로 회복되었다. 황후는 843311, 사순시기 첫 주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지금도 동방 정교회에서는 이날을 정교 신앙의 축일(Sunday of Orthodoxy)”로 기념하고 있다.

 

5. 유럽 교회의 입장

 

중세 유럽의 강력한 지배자 카를 대제(768~814)는 자신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공의회를 소집한 여황제 이레네의 독단적인 행동에 격렬하게 반응하며 카를 문서를 작성,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였다.

동로마 황제들의 성상 파괴주의는 포교의 수단으로 성상을 적극 활용하던 로마 교황의 반발을 사서 동서 교회의 갈등을 유발, 1054년 상호 파문으로 벌어진 동서 교회 대분열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게르만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은 962년부터 1806년까지 서유럽과 중유럽에 존속했다. 962년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대제(936~973)에게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당시 교황의 처지에서는 명목상으로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로 자처하는 동로마 황제에 맞설 수 있는 권위자로 오토 1세가 적임자로 생각되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서로마 제국이 몰락(476)한 후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은 정통 보편제국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이후 황제의 서열은 가톨릭 세계의 모든 군주 가운데 가장 높았고, 그 권위로 교회의 옹호자임을 자처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교황과의 연고를 통해서 서유럽에 대한 영향력과 명분을 미약하나마 유지해 왔고, 단성론 논쟁이라는 종교적 내분을 해소하며 이를 확고히 하는 듯했으나, 성상 파괴주의의 발흥이라는 종교적 내분이 재차 발생하여 교황과의 연고를 스스로 포기하게 되었다. 이 결과 교황은 새로운 보호자 신성 로마 제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후 동방과 서방 교회 간의 교류는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고, 마침내 1054년의 동서 교회 대분열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6. 개신교 종교 변혁과 함께 시작된 성화상 논쟁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이자 학장인 칼슈타트(A. Karlstadt)는 성상을 우상과 동일시하여 가톨릭의 성상 숭배의 전통을 비난하며 나섰다. 비텐베르크 성채 성당에서 사목하던 그는 152110월 성직을 포기하고 양형 영성체를 도입하면서 그해 12월 성상 파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성탄절에는 제의도 입지 않고 세속 옷을 입은 채 신자들에게 성혈을 영해 주었다. 루터와 같은 수도회 수사였던 츠빌링(G. Zwilling)은 미사와 수도 생활을 강하게 반대하는 강론을 통해 수도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고 미사는 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비텐베르크의 학생들과 주민들은 성화상을 파괴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를 폭행하였으며, 루터의 수도서원에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 수도자들은 속속 수도원을 떠나고, 일부 지역에서는 성직 포기와 환속이 이어졌다.

 

루터는 처음에 성상에 대한 문제를 아디아포라(adiaphora 무관한 것)의 영역으로 생각하였다. 루터가 생각하는 성상은 그것이 숭배되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성상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루터는 성상이 있더라도 그것을 숭배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상이 아니라고 여겼다.

루터는 성상을 교육적인 목적으로 긍정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단어들이 시각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서, 성경의 메시지를 읽거나 들을 때 이미 마음속에 상을 만들어 놓게 되는데, 성상은 이것의 확장적 표현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루터는 성상 자체는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지만, 성경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을 돕는 촉매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16세기 칼뱅파 종교 변혁가들은 성당 안 대부분의 벽화와 제단들을 제거했고, 성전 내부에는 어떠한 장식적인 요소도 남겨두지 않았다. 당시 칼뱅은 중세교회의 잘못된 관행으로 물든 교회를 바로 세우려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이 세상 사이에 중개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칼뱅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있으며, 이 심연은 교회 내 성상들, 성인들의 유골 혹은 유품들로 메울 수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칼뱅의 판단이 성상 파괴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칼뱅은 예술의 재능은 하느님이 주신 은사라고 봤으며, 조각, 회화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그 재능을 순수하고 정당하게 사용한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4: 디딤돌이 된 화상 파괴 논리 미술 교육에 적용

 

조형예술대학 학장 조광호 신부님의 가르침 - 미술 배우는 초보자들에게 도움을 준 방법

성화상에 관한 고정 인식을 파괴하기 위해 그림 원본을 거꾸로 놓고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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