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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책을 사랑한 이들이 이룬 신앙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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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책을 사랑한 이들이 이룬 신앙의 모습

 

1. 선교 여행 때도 책을 지니고 다닌 바오로 사도

2티모 4,13 올 때, 내가 트로아스에 있는 카르포스의 집에 두고 온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져오십시오,”

 

2. 요한 사도가 목격한 <생명의 책>

요한 묵시록 1,11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요한 묵시록 20,12 그리고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3. 천주실의칠극을 저술한 예수회 선교사들

 

1)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이마두)

1601년에서 1610년 사이에 북경에서 전교 및 저술 활동을 하였다. 천주실의는 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인 리치 신부가 한문으로 집필한 교리서이다. 1603년 간행된 북경 제1 판본 천주실의, 1604년 예수회 동양 순찰사 발리냐노 신부의 주선으로 광동성 소주(韶州)에서 제2 판본이 간행되었다. 그 후 1607년 리치 신부의 충직한 협력자였던 중국인 학자 이지조에 의해 제3 판본이 항주(杭州)에서 판각 · 간행되었다.

리치 신부는 유교·불교·도교를 터득하고 있는 중국 선비[東士]와 그리스도교 문화와 스콜라 철학의 전문적인 교양을 갖춘 서양 학자[西士]의 대화·토론 형식으로 이 책을 편집하였다. ·28편에 걸쳐 174항목에 이르는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이 책은, 천주교 서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및 서양 사상과 유교 및 동양 사상이 만나는 서학서인 동시에 스콜라 철학과 유교 철학이 만나는 철학서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리치 신부는 먼저 천지창조, 하느님, 영혼 불멸, 천당 지옥, 상선벌악,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난 일[肉化] 등 천주교 교리의 기본 문제를 풀이하였다. 그런 다음에 도교·불교가 실속 없이 헛된 가르침이며, 유학의 ’()도 만물의 참된 근원이 아니고 오직 하느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밝혔다.

조선에 전해진 천주실의는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책에 관한 학문적 차원의 글을 남긴 홍유한, 안정복, 신후담, 이헌경 등이 있었다. 이들 중 신후담, 안정복, 홍정하는 천주실의를 비판하고 배격하였다. 이와는 달리 18세기 중엽 이후 이벽(세례자 요한이승훈(베드로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설립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후반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천주실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개된 보유론적 서학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천주교회가 설립된 뒤에는 한문을 가까이할 수 없는 서민층을 위해 천주실의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필사본으로 유포시키기도 하였다.

 

2) 디에고 데 판토하(Diego de Pantoja, 1571~1618, 방적아 龐迪我)

판토하 신부와 마테오 리치 신부는 1601년에서 1610년 사이에 북경에서 함께 활동한 스페인 출신 예수회 신부였다. 판토하는 궁정악사들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리치가 사망했을 때 리치를 위해 묘지를 하사해 주도록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릴 정도로 중국어 구사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1614년 북경에서 칠극을 출간하였다. 칠극은 죄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인 칠죄종(七罪宗), 즉 교만, 질투, 탐욕(인색), 분노, 탐식, 음욕, 게으름을 일곱 가지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자신을 이겨야 한다는 함축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7437면으로 출간되었고, 권마다 하나의 죄를 제시하고 그 아래에 제목 풀이를 달아 저술 목적을 이끄는 말(導論)로 삼아 정의하였다. 본문에서는 먼저 해당 죄에 관하여 성찰한 다음에 그 죄의 극복 방법을 제시하였다. 특히 판토하 신부는 성서와 성인, ·서양 인물의 사상과 교훈을 풍부하고 흥미롭게 인용하면서 유교 용어로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당시 유학자들에게 그리스도교적 수양론을 이해시키고, 나아가 보유론적 역할을 강조하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광해군 때 허균이 칠극을 중국에서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은 출간 직후 조선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4. <한역서학서>들이 조선 천주교회에 미친 영향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명과 가져왔던 외교 관계를 청()과도 유지하면서 1637년부터 이승훈(베드로 1756~1801)이 북경에 갔던 1783년까지 147년간 총 167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했었다. 이 사신들에 의해 조선에 들어온 문물들은 매우 다양했는데, 천주교 교리서는 물론 천문, 지리, 수학 등에 관한 서적들과 세계 지도, 천리경, 자명종, 악기, 무기 등이 있었다.

 

1) 허균(1569~1618)

허균은 관직 생활 중 두 차례에 걸쳐 사신으로 명을 다녀왔다. 1614년에는 천추사, 1616년에는 동지사로 명을 다녀왔다. 그가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는 마테오 리치 신부가 선교를 위해 편술한 천주실의를 비롯한 많은 한역서학서가 널리 유포되고 있었으며, 북경 최초의 성당인 남당(南堂)이 건립(1605)되어 있었다. 허균은 두 차례의 사행에서 당시의 중국 문명을 직접 경험하였으며, 15,000냥가량의 은을 가지고 가서 4,000권에 달하는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구매하였다.

이때 그가 구매한 서적들 가운데 한역 서학지도와 천주교 기도서로 간주하는 게십이장(偈十二章)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허균의 손위 동서 이수광은 허균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믿는 무리가 생겼으며, 천주교를 믿는 자는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안정복은 천학문답에서 고금을 통하여 하늘의 학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옛적에는 추연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허균이 있다라고 하면서, 허균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학 창도자로 지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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