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강론
연중 제30주간 수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구원이든 자기 실현이든 매사에 숫자나 통계등 외적 결과를 중시한다.
이 때 사람은 구원이나 자기실현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객체로 떨어져 소외될 수 있다.
위 문장의 동사"구원받을"의 시제는 미래형 - 삶의 객체로 소외되어 미래의 걱정거리에 짓눌리는 사람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의 답변은 사람 숫자가 아니라, 방법을 말씀하시는 동문서답, 우문현답.
숫자나 통계등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참여하여 자신의 본 모습에 충실할 것을,
미래에 관한 지레짐작의 염려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힘을 쓰는(현재형 동사)" 태도를 당부하신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편한 길, 쉬운 것만 찾아가려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 가득찬 눈길이 그려진다.
그리고 미래의 어떤 곳으로 한눈팔기보다 지금 여기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는 마음을 본다.
죽음과 부활의 가장 "좁은 문"으로 온 "힘을 다해" 목숨을 내어 주시며 들어 가셨던 분.
어떤 과학자가 하루는 나비가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화되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런데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와야 하는데
바늘구멍만한 작은 구멍을 통과해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무척 힘들어 보였다고 한다.
나비가 불쌍해서 가위로 그 구멍을 조금 잘라주었다.
그랬더니 나오기는 잘 나왔는데 문제는 잘 날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깐 작은 구멍으로 나오려고 안간 힘을 쓰면서 나비가 날개의 힘을 얻었는데
그 과정을 없애주니 편하고 좋았지만 날개가 힘을 얻지 못해서 못 날았다고 한다.
나비가 좁은 구멍을 애처롭게 통과하며 날개에 힘을 얻듯,
우리가 희생과 섬김의 힘들고 좁은 문을 거칠 때 하늘나라로 향할 기운을 얻기에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왜 우리 삶에 가난이나 질병 혹은 여러 가지 시련이 이어질까?
우리를 사랑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고통을 받게 하실까?
어쩌면 그것들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구원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작성자 산길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