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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강론

부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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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부활 대축일 강론 자료 - 소사 성당 주임 신부 시절


오늘 복음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을 때 예수님의 시체가 없자 부활을 믿기보다는 질겁하고 사도들에게 알렸다. 당연한 일이다. 도대체 사흘 동안 완전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니 믿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부활을 체험하고 믿음을 새롭게 갖게 될까? 죽음을 넘어서는 신비를 몇 마디 말로 요약할 수는 없다. 복음에서 묵상의 실마리만 찾아본다. 네 복음서 공히 예수님의 부활을 보도하는데 각별히 강조한 공통점은 '빈 무덤'이다. 부활 장면을 직접 기술한 대목은 없고 다만 예수님을 묻은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전한다. 부활하신 주님과 대면하기 전에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의 육신이 없어진 명백한 사실, '빈 무덤'이라는 황당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체험의 발단은 여인의 애타는 사랑이었다.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 마리아." 이 상황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만나기 이전이다. 왜 어두운 이른 새벽에 무덤에 갔을까? 사랑 밖에는 답이 없다.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고 사랑이 사람을 움직인다. 밤을 넘고, 죽음을 넘어 새 세상을 가져온다.

 

마리아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진 사실을 보고 달음질하여 사도들에게 이를 알린다. 부활하신 분을 홀로 모시지 않는 모습이다. 마리아의 사랑은 독점적이거나 분파적이지 않고 나누며 함께하는 사랑이자, 진부하게 보일 정도로 사도들, "교회와의 친교" 안에 있는 사랑이었다. 이어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에 달려가서 사실을 확인한다

 

여기서 부활 신앙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을 믿기보다는 놀라고 걱정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기에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하고 사도들에게 알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반응도 부활을 믿기보다는 놀랐고 궁금했다. 처음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오늘 복음에서 빈 무덤 확인 과정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보다"라는 동사는 우리말로는 모두 동일하게 번역되지만 본문에서는 서로 다르게 세 단어가 쓰인다. 첫째로 20 5절에서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으나"라는 구절에서 "보다"로 사용한 동사는 "blépei"'얼핏 보고 뜻을 이해한다.' 는 의미다. 둘째로, 6절에서 "베드로는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라는 구절에서 사용한 '보다' 동사는 "theōrêi"'보고 생각하는, 의문을 갖고 이해하기 위해 힘쓰는 태도'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8절에서 "(그리고) 보고 믿었다."라는 구절에서 "보다 êiden"는 뜻은 '보고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즉 눈앞에 벌어진 현상을 넘어서서 그 속에 감춰진 실재를 깨닫는 단계'를 의미한다. (A. M. Canopi 주석 참조)

 

"보는 행위"는 이처럼 점진적인 양태로 묘사된 바, 신앙인에게 부활 신앙은 고정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작은 시작에서 비롯하여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성숙하는 여정임을 보여준다. 그 신앙의 성숙 여정에서 관건은 물론 예수님과의 친교. 얼만큼 그분과 가까우냐는 기준에 따라 깊어지고 충만해지는 빛으로의 여정이다.

 

 빈 무덤을 보고 "믿었다"는 말씀은 무엇을 믿었다는 말씀일까? 이 표현 뒤에 "사실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이어지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보고 믿은 사실의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현상이라기보다는 생전의 말씀이다. "빈 무덤을 보고 그제서 예수께서 살아서 하신 부활하리라는 말씀의 진정성과 정당성을 믿게 되었다는 의미다"(H.U. von Balthasar). 예수님께 대한 신앙은 객관적 사실의 증명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빈 무덤'으로 대표되는 모든 불가해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행위가 빈 무덤을 보고 믿는 부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듯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은 부활의 증거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는 사실이었다. 그 믿음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처음에 빈 무덤에 놀란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되새기자 점차 놀람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변화되었다. 그러기에 그 믿음은 물리적 사실에 관한 믿음이라기보다, 살아생전 전하신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생전의 말씀을 반추할 때 비롯되는 믿음이었다.

 

분명하고 강력하고 화려한 부활 장면을 보여 주시면 부활 신앙이 더 확실해질 텐데, 어찌하여 조용히 "빈 무덤"을 통해 조금씩 부활의 신비를 보게 하실까? "그분께서 조용히 행하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다. 하느님은 인류의 장대한 역사 속에 서서히 당신의 역사를 세우신다. 인간이 되신 그분을 동시대인들과 역사의 주도적 세력가들은 간과한다. 그분께서는 고난 받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신 분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당신 제자들의 믿음을 통해서만 인류에게 오시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계속해서 조용히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그분께 자신을 개방하면 그때 서서히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다. 우리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증거자들에게 귀 기울이고, 주님께서 당신 자신과 증거자들을 언제나 새롭게 공적으로 증거 해 주시는 표징들에 우리 자신을 열 때, 우리는 그분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분은 살아 계신 분이다. 그분께 우리 자신을 믿고 맡기면 우리가 올바른 길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베네딕토 16, 나자렛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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